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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

현대미술의 개념 : 팝아트

by 지유 2025. 11. 26.

팝아트는 길게 잡아서 10년이나 12년 정도의 역사가 있다. 이 용어 자체는 1954년에 영국의 비평가인 로렌스 알로웨이가 매스컴 광고 문화에 의해 창조된 '대중 예술'을 가리키는 편리한 이름으로 처음 사용했다. 알로웨이는 그 후 1962년, 이 명칭을 확대하여, '미술'과 관련하여 대중적 이미지를 사용하려고 시도하던 예술가들의 행위를 이 명칭 속에 포함했다. 그 후로 수많은 다른 명칭들이 이 명칭과 경쟁해 왔지만, 팝아트라는 명칭은 가끔 예술가들 자신의 항의가 있었음에도 굳어졌다.



영국에서 만들어진 최초의 진정한 팝아트 작품은 일반적으로 리처드 해밀턴의 콜라주 작품 '오늘의 가정을 그토록 색다르고 멋지게 만드는 것은 무엇인가?'였던 것으로 인정된다. 이 작품은 1956년에 화이트채플 아트갤러리에서 열렸던 '이것이 내 일이다'라는 이름의 전시회를 위해 만들어졌다. 팝아트가 영국 대중에 처음으로 큰 영향을 준 것은 1961년에 있었던 청년 현대 작가전이었다. 이 전시에는 데이비드 호크니, 데렉 보쉬에, 알렌 존스, 피터 필립스, 키타이 등의 작품이 포함되었으며, 이로써 젊은 예술가들 세대를 확립했다. 같은 해에 피터 블레이크는 현대미술 원에서 그의 첫 개인전을 열었다.



미국에서 팝아트의 발전을 설명하는 것은 좀 더 까다롭다. 미국의 팝아트는 만연하던 추상표현주의 양식의 물결에서부터 놀랄 만큼 느린 단계를 거쳐서 발전해 왔으며, 미국의 팝 작가들은 여전히 추상표현주의의 거장 가운데 한 사람인 데 쿠닝을 자신들의 작품에 가장 중요한 영향력 있는 사람으로 일컫는다. 미국의 팝아트에서 중요한 해는 1955년으로, 이해는 로버트 라우센버그와 재스퍼 존스가 뉴욕 예술계에 등장한 것으로 주목할 만하다. 1958년에 재스퍼 존스는 최초의 개인전을 가졌는데, 뉴욕의 비평가인 레오 스타인버그는 자신이 본 것에 대한 반응을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마치 데 쿠닝과 클리인의 그림이 갑자기 렘브란트와 지오토의 그림과 함께 한솥에 던져진 것 같았다. 갑자기 모두가 똑같이 환상의 화가가 되어버렸다." 그럼에도 전반적인 뉴욕의 미술계가 팝아트의 본격적인 충격을 느낀 것은 1961년 초에 이르러서였다.



팝아트는 매우 색다른 역사를 가졌기 때문에 사건을 대담하게 서술할 필요가 있다. 팝아트의 수용 과정은 이보다 앞섰던 현대미술 양식들의 수용 과정과는 매우 다르다. 짧은 기간의 부화기가 있었던 것이 사실이다. 최초의 약 5년간 팝아트는 다소간 '지하 운동'으로 존재했다. 이윽고 팝이 지상으로 나타났을 때 그것은 위축은 물론 심지어 저항을 겪는 순간을 맞이했다. 이것은 여러 가지 역사적인 요일들로 인해 뉴욕에서 특히 심하게 일어났다. 최초로 국내에서 발전된 양식으로서 국제적인 명성을 획득한, 추상표현주의가 미국에 자리 잡고 있었다. 마리오 아마야가 팝아트에 관한 그의 책에서 말했듯이 이제 이 새로운 화가들은 "미국이 성취한 것 전부를 창밖으로 차버리는 것같이 보였던" 것이다. 가장 강력하고 지적인 미국 평론가들 중의 한 사람인 해럴드 로젠버그는 새로운 운동을 거의 즉석에서 뭉개버렸다. 그는 "충격 가운데 좋은 면이 있다면, 그것은 추상미술의 경우 그것을 수식하는 말들이 너무나 여러 번 되풀이해서 사용됨으로써 마침내 바닥나버린 것과는 대조적으로, 환상을 추구하는 미술의 경우에는 그것에 대해서 거론하기가 쉽다는 사실에 기인한다"라고 말했다. 그에게 팝아트는 단지 '하나의 미술 비평 거리'에 불과했다. 이와 같은 여러 가지 회의와 항의에도 아랑곳없이 팝아트는 물질적인 차원에서는 성공을 거두었다. 그것은 대중에 침투하는 데 성공했고, 수집가들의 수집 대상이 되었다. 놀랄 만큼 짧은 기간에 팝아트 주요 작가들의 위치는 확고해졌고, 부유해지기까지 했다.



내가 지금까지 설명했듯이 초기에는 머뭇거림이 있었으나 현재 팝아트는 다른 어느 곳에서보다도 미국에서 더 큰 영향력과 더 확고한 뿌리를 형성했다. 이 점에 대한 근본적인 원인은 아마도 '비평적 과정의 합성적 유형'이란 공동 문헌에 실려 있는 런던 로열 대학의 한 학생의 말에서 추론할 수 있을 것이다. 그는 "팝아트는 소비자 환경과 그 심리 상태를 묘사한다. 그러므로 여기서는 추한 것이 아름다움이 된다"라고 말한다. 아마도 여기에 같은 문헌에 있는 다른 말을 덧붙일 수도 있다. "작가의 주제에 대한 태도에 의해서 주제가 내용의 지위로 끌어올려진다." 전후 미국 회화는 민족주의적이기를 고집해 왔다. 미국 미술계의 지도자들은 유럽에서 진행되던 일들에 대해서 자주 참을 수 없는 감정을 표시했다. 주도적인 미국의 화가들은 몹시 경쟁적이었고 그들의 적수인 유럽 화가들의 작품에 대해서 공공연하게 경멸을 드러내는 일이 잦았다. 1950년대의 실험을 거쳐 태어났기 때문에 팝아트는 미국의 도시 환경을 포착하는 데 이상적인 도구였다. 팝아트가 잘 팔리지 않는 상업 디자인에서 물려받은 공격적인 요소는 미국의 화가들에게 특히 매력적이었다. 실제로 이들은 자신들이 실천하는 양식이 특별히 미국적인 형통을 가졌다는 것과 담배 상점의 인디언이나 서민적인 향기 그리고 미국에서 이미 매우 널리 인기를 끌고 수집 대상이 되었던 '아메리칸 프리머티브'야말로 자신들이 성취하려는 것에 대한 일종의 공적인 '인가'나 '면허'를 제공하는 것이라고 확신했다. 1965년 4월에 밀 위키 미술관에서 열린 '팝아트와 미국 전통'이란 제목의 중요한 전시가 그러한 과정을 웅변적으로 확신시켜 주었다.

 

 

에드워드 루시 스미스

Edward Lucie-Smit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