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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

현대미술의 개념 : 데 슈틸

by 지유 2025. 11. 25.

신조형주의의 전개와 소멸 : 1917~1931



예술은 삶의 아름다움이 아직 불완전한 동안의 대용품일 따름이다.

삶이 균형을 얻게 됨에 따라 예술은 그에 비례해서 사라지게 될 것이다.

- 피에트 몬드리안



1917년에서 1931년 14년 동안 활발한 세력으로 존재했던 데 슈틸 또는 신조형주의 운동은 본질적으로 피에트 몬드리안과 테오 판 두스부르흐 등의 화가와 건축가 게리트 리트벨트 등 세 사람의 작업 속에 그 특징이 나타나 있다고 볼 수 있다. 1917~1918년 판 두스부르흐 주도로 결성되었던 초창기 그룹은 다소 막연한 성격의 것으로서, 이때 멤버들 9명 중에서 나머지 7명은 반 데르 레크, 반통겔루, 후차르 등의 화가와 오우트, 빌스, 반트 호프 등의 건축가, 시인 코크 등인데, 이들 모두를 돌이켜볼 때 촉매 역할은 했지만 비교적 부차적인 인물들이다. 이들은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긴 했지만 운동의 성숙한 양식을 형성하는 데 중심점을 마련한 실제적이거나 이론적인 작품을 창조하지 않았다. 어쨌든 이 그룹은 1918년 11월에 발간된 '데 슈틸'지 첫 호에 판 두스부르흐 편집으로 실린 첫 번째 데 슈틸 선언에 이들 예술가의 대부분이 서명인으로 등장함으로써 형식적으로 모였을 뿐으로, 처음부터 엉성한 결합이었다. 이 그룹은 항상 유동적 상태로 있어서 적어도 한 명의 창립 멤버 바르트 반 데르 레크가 창립 후 1년 이내에 그룹에서 탈퇴했으며 그 후에 리트벨트 등 다른 사람들이 이를 대신해서 새 멤버로 가입했다.



데 슈틸 운동은 관련성을 가진 두 개의 사고방식이 융합함으로써 태어났다. 이들은 첫째, 각각 1915년과 1916년에 부숨에서 큰 영향을 끼친 저서 '세계의 새로운 이미지'와 '조형 수학의 원리'를 출판한 수학자 쇤매커스 박사의 신플라톤주의 철학과 둘째, 헨드릭 페트루스 베를라게와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의 권위가 인정된 건축 개념이다.



네덜란드의 예술 사학자가 말한 대로 데 슈틸 운동의 조형적, 철학적 원리를 문자 그대로 형성한 것은 쇤 매커스였다는 점을 인정해야 한다. 그는 저서 '세계의 새로운 이미지'에서 직각의 우주적인 탁월성에 대해 다음과 같이 언급했다. "우리 지구의 형태를 이루는 두 개의 근원적인 정반대 요소는 지구가 태양 주위를 도는 경로인 힘의 수평선과 태양의 중심에서 발생하는 광선의 심원하게 공간적 운동인 수직선이다." 그리고 같은 책에서 다시 데 슈틸의 원색 체계에 대해 언급했다. "주요한 세 개의 색채는 본질적으로 노랑, 파랑, 빨강이다. 이것만이 존재하는 유일한 색이다. 노랑은 빛의 운동이며 파랑은 노랑의 대조 색이다. 색채로서, 파랑은 창공이며, 선이고, 수평 상태다. 빨강은 노랑과 파랑의 짝을 짓는 색채다. 노랑은 빛을 발산하고, 파랑은 '물러나며' 빨강은 떠 있다."



이것은 실용적인 관점에서 수평선을 '길든 선', 즉 그 선을 배경으로 '몇 인치의 높이가 막대한 힘을 얻게 되는' 대조적인 대초원의 선으로 강조한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의 세계관과는 매우 다르다. 그러나 라이트 역시 전적으로 동질적인 인공 세계를 환기했음은 '바스무트' 1권에 쓴 자기 작품에 대한 서문에 나타난다. "건물과 그것을 위한 설비를 별개의 것으로 생각하기란 불가능하다. 난방 기구, 조명 기구, 의자와 테이블, 캐비닛과 악기 등 실질적인 것이 건물 자체에 속한다." 그리고 후에 건축에 대한 예술의 역할에 대해 "그렇게 해서 주거를 그 자체로 완전한 예술품, 조각이나 회화의 어떤 것보다 더 표현적이고 아름다우며, 그것들보다 더 삶에 밀착된 예술품으로 만드는 것, 이것이 현대 미국이 가진 기회다."라고 썼다.



라이트의 이러한 건축에 대한 개념은 1910년과 1911년에 그의 작품에 대한 유명한 두 권의 '바스무트'가 독일에서 출판됨으로써 유럽 전역에 보급되었다. 그리하여 쇤 매커스와 라이트의 글에서 요약된 바대로 연관성이 있지만 독립된 이들 두 개의 사상은 1915년 이르러 대중에 보급되었다. 거의 순전히 잘린 수평선과 수직선 들로 이루어진 몬드리안 최초의 엄격한 후기 입체주의 구성이 출현하는 시기는, 그가 1914년 7월 파리에서 네덜란드로 돌아온 것과 그 후 라렌에 머물면서 거의 매일 쇤매커스와 접촉하던 시기와 일치한다. 다른 하나의 '대립하는 사상'을 직접적으로 주입한 것은 반트 호프로서 그는 전쟁 이전에 미국에서 체류한 이후 1916년에 그의 휘스-테르-하이데에 자신이 설계한, 라이트에게서 유래한 스타일의 철근 콘크리트를 사용한 초기의 주목할 만한 변장을 실현했다. 역설적으로 1917년 이후에 쇤매커스나 반트 호프는 모두 이 운동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지 않게 된다. 이때로 말하자면, 이미 그들은 맡은 구실을 다한 것이다. 그들이 각각 일으키고 전파한 사상들은 전후에 데 슈틸 운동의 중심인물들인 몬드리안, 판 두스부르흐, 리트벨트 들에 의해 재빨리 흡수되어 변형되었다. 



다른 두 사람의 주변적 인물이 종전 직후의 시기에 짧은 기간이나마 촉매 역할을 담당했다. 한 사람은 벨기에 화가 조르주 반통겔루였고, 다른 한 사람은 네덜란드의 선구적인 추상화가였던 성미 급한 반 데르 레크인데, 두 사람의 공헌은 지금 와서 볼 때 매우 결정적이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그들이 없었더라면 데 슈틸의 주도적 예술가들이 자신들의 독특한 미학을 그와 같은 즉각적인 신념을 가지고 발전시킬 수 있었겠는가, 즉 1917년의 초기의 모색에서부터 불과 6년 후인 1923년의 완숙한 스타일로 비약하는 것이 가능했겠는가 하는 심각한 의문이 들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1916~1917년에 제작된 판 두스부르흐의 유명한 추상화된 소의 그림은 반 데르 레크의 영향을 크게 받았으며, 1919년의 반통겔루의 조각 작품 '질량의 상호 관계'는 일반적 형태에서, 판 두스부르흐와 반 에스테렌이 1923년에 예술가의 집과 로젠베르크 하우스의 계획안에서 이용한 질량의 미학을 분명히 예고하고 있다.



데 슈틸 운동의 미학과 강령의 발전 과정은 세 단계로 나뉠 수 있다. 1916~1921년에 이르는 1단계는 형성기로서 약간의 외부 참여 외에는 주로 네덜란드가 중심이 되었다. 2단계인 1921~1925년은 성숙기이며 국제적으로 이 운동이 보급된 시기다. 반면에 3단계인 1925~1931년은 변화와 궁극적인 붕괴가 일어난 시기로 봐야 한다. 몬드리안이 데 슈틸의 전개 과정에 대하여 가지는 위치는 각 단계의 성격을 결정하는 데 중요한 시금석이 된다. 금욕적이고 이상스러울 만큼 심각한 그 태도의 결과로 몬드리안은 자신을 둘러싼 세계의 직접성에서 항상 어느 정도의 간격을 유지할 수 있었다. 1914년에 라렌에서 '앞으로의 운동'과 쇤 매커스의 사상을 최초로 접목한 것은 이미 신지학적인 경향에 몰입한 몬드리안이었다. 또한 1916년에 라이덴에서 몬드리안과 판 두스부르흐에게 즉각적인 영향을 준 반 데르 레크와의 사이에 수확이 풍부한 교류를 이룩한 것도 몬드리안이었다. 다시 한번 몬드리안은 쇤 매커스에 의해 미리 정해진 직각의 형식을, 판 두스부르흐가 '독단적으로' 변형시켰다는 것 때문에 1925년에 데 슈틸과도 판 두스부르흐와도 마침내 절연했다. 

 

케네스 프램프턴

Kenneth Frampt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