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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

현대미술의 개념 : 다다이즘

by 지유 2025. 11. 25.

다다라는 이름은 취리히에서 처음 쓰였다. 그러나 전후에 다른 나라나 집단에 신속하게 이름이 전파된 것을 보면 그런 성향이나 활동이 이전부터 존재했음을 의미한다. 그것은 본질적으로 국제적인 운동이었다. 취리히의 다다이스트를 보아도 차라와 얀코는 루마니아 사람이고, 아르프는 알사스 사람, 발, 리히터와 휠젠베크는 독일 사람이었다. 또한 이 운동은 유럽에만 국한되지 않았다. 뉴욕에서는 국외로 탈출한 프랑스인 뒤샹과 피카비아가 원시 다다이스트 평론 '391  '롱롱'을 전쟁 중에 발간했고 불만을 품은 일단의 젊은 미국인들을 규합했는데, 그중에는 만 레이도 있었다.



'다다'는 브르통이 말한 대로 "정신의 상태다." 정신의 상태는 전전에 풍토병같이 유럽을 휩쓸었으나, 전쟁은 허다한 젊은 미술가와 시인들의 불만에 새로운 근거와 긴박함을 부채질했다. 휠젠베크는 1920년에 이렇게 썼다. "우리는 전쟁이 여러 정부에 의해 가장 전제적이고 비열하고 물질주의적인 이유로 고안되었다는 사상에 동의한다." 전쟁은 탐욕과 물질주의에 입각한 사회의 단말마적 고통이었다. 발은 다다를 사회를 위한 진혼곡으로 이해했으며, 새로운 사회의 원초적 출발로 보았다. "다다이스트는 이 시대의 죽음의 격통과 죽음의 만취에 대항했다. 그는 제도들로 이루어진 이 세계가 산산조각이 났다는 것과 돈만을 요구하는 사회가 무신론적 철학들의 염가 판매를 조직화했다는 것을 안다." 예술 자체는 이 사회에 의존한다. 미술가와 시인은 유산계급에 의해 그들의 '유급 노동자'가 되었다. 예술은 체제를 유지하고 떠받치는 데 이용될 뿐이다. 예술은 차라가 다음에서 지적한 복잡한 영상만큼이나 유산계급 자본주의와 교묘하게 밀착되었다. "예술의 목표가 돈을 벌고, 그 멋지고 멋진 유산계급에 아첨하는 것이란 말인가? 예술의 소리는 돈 버는 소리와 맞아떨어지고, 흘러가는 방향은 배불뚝이의 옆모습을 따라 이끌려 내려가고 있다. 모든 예술가 대열이 별나라의 온갖 해성들에 군마를 타고 몰리더니, 이제는 신탁회사에 당도했다." 예술은 문자 그대로나 비유적으로나 상거래 행위가 되었고 미술가는 정신적 용병이, 시인들은 '언어의 은행가'가 되어버렸다. 이것은 일종의 도덕적 안전판이 되어 지극히 의심스러운 애국심을 전달했다. 다다이스트들의 반역은 복잡한 아이러니를 포함한다. 왜냐하면 그들 자신은 파멸할 운명에 놓인 사회에 의존하고 있으며, 사회와 그 예술의 파괴는 미술가로서의 그들 자신의 파괴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느 의미로는 다다는 자신을 파괴하기 위해 존재했다고 볼 수 있다.



자크 바쉐는 1918년에 다다에 대하여 들은 적이 없으나, 이 정신 상태의 아이러니를 완전히 이해하고 있었다. "게다가 예술은 물론 존재하지 않는다. 그런데도 우리는 예술이란 것을 만든다. 예술이 원래 다른 것이 아니고 그런 것이니까. 당신이라면 이에 대해 뭐라도 하겠다는 말인가?"



"그래서 우리는 예술도 예술가도 좋아하지 않는다. 모두 한통속이다. 어차피 약간 까다롭고 낡은 서정주의는 토해버려야 하니까, 이왕 하려면 서둘러서 순식간에 해치우자. 기관차는 빨리 가니까." 다다이스트들은 그것들이 빈번히 트로이의 목마처럼 반미술적 대상일지라도 계속 무엇인가를 만들어낸다.



다다의 정신 상태는, "렘브란트의 작품을 활용하여 다림질 판으로 기성 상품화"하자는 뒤샹의 착상과 바닥에 주석 압정들이 죽 튀어나와 있는 일반 다리미를 나타낸 만 레이의 '선물'을 나란히 놓고 보면 잘 표현되어 있다. 



피카비아는 말했다. "진정 유일하게 추악한 것은 예술과 반예술이다. 어떤 예술이든지 나타나기만 하면 생명은 사라진다." 예술 작품의 불신과 함께 '몸짓'의 활성화가 등장한다. 다다는 생활양식이다. 발은 다음과 같이 썼다. "사상의 파산은 인간성의 개념을 최하의 밑바닥까지 파멸시켰고, 본능과 유전적 배경은 이제 병적으로 나타난다. 어떤 예술이나 정치도 종교적 신념도 이 파괴적 급류를 막을 수 없기 때문에 오직 '농담'과 출혈적 자세만이 남는다." 1918년에 크라반은 미국에서 경주용 배로 멕시코를 향해 떠난 후 종적을 감추었다. 다다적 몸짓은 얼마든지 있다. 하나 더 예를 들면, 뒤샹 머트라는 익명으로 뉴욕에서 연 독립 전시회에 '분수'라고 이름 지은 소변기를 출품하고, 소동이 벌어지도록 배후에서 능란하게 조직한 것이라든지, 사람들이 그 전시를 거절했을 때 배심원 직을 사임한 것 등이다.



그런 몸짓의 영향은 다다이스트들이 거기에 집중한 정열에 비하면 아주 보잘것없다. 다다는 마치 나름의 생명을 다한 것 같았다. 다다이스트 간에는 진정한 합일점이 없었다. 그들의 전시에서 예를 들면 사람들은 그 작품의 지리멸렬함에 놀랄 것이다. 거기에는 어떤 일관성이 있는 다다 '양식' 같은 것이 전혀 없다. 다다이스트들은 꾸준히 예술 활동을 했지만, 모두가 제갈량이었다. 다다는 다른 지역에서 다소 다른 특성을 가졌다. 그렇지만 넓은 안목으로 다다 안에서 두 강조점을 가릴 수 있다. 하나는 낡아빠지고 부적절한 유미주의에 대신할 새로운 미술을 추구하는 유파로, 발과 아르프가 여기 속한다. 다른 하나는 차라나 피카비아와 같이 조소를 파괴의 수단으로 삼고, 예술가로서의 그들의 사회적 동일성에 대해 일반 사람들을 희롱함으로써 그들 위치의 아이러니를 이용하는 유파다. 피카비아는 파리에서 다다 예술가로서 크게 성공했다.



취리히에서 다다는 다소 새로운 미술 운동의 양상을 띠었다. '새로운 매개체'로 콜라주를 실험하고 새로운 시어를 사용했다. 아르프는 훗날 이렇게 기록했다.



1915년에 취리히에서, 세계대전의 살육장에 흥미를 잃고, 미술로 관심을 돌렸다. 멀리서 대포의 포성이 은은히 울리는 가운데 풀로 붙이고 시를 짓고 온 영혼을 기울여 노래를 불렀다. 우리는 이 시대의 광란에서 인류를 구원할 본질적 예술을 모색했다.

 

던 에이드스

Dawn Ade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