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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

현대미술의 개념 : 소용돌이파 2, 다다이즘과 초현실주의 1

by 지유 2025. 11. 24.

소용돌이파 2



'블래스트'는 입체파와 미래파에 대하여 이제까지 쓰인 글 가운데 가장 탁월한 비평을 다소 수록했다. 웨즈워스는 칸딘스키의 책 '미술에서의 정신적인 것과 관련하여 대한 논평을 광범위한 발췌 번역문과 함께 실었다. 이 무렵 웨즈워스의 회화 작품은 루이스의 작품보다 더 합리적이고 차분했다. 이 작품들은 어떤 면에서 볼 때, 칸딘스키가 전후에 바우하우스에서 빌렸던 양식을 예고한 것이다. 이 무렵까지만 해도 그 양식은 칸딘스키의 글에서 이론적으로만 구상되는 단계였다. 루이스의 작품은 웨즈워스에 비해 역동성이 더 강하지만, 화면 구성의 긴장감은 덜하다. 그의 작품은 첫 소설 '타르'에서 보였던 것과 같은 종류의 거칠고 다소 비인간적인 에너지를 지니고 있으며 강력하고 지능적이다. 두꺼운 해면 지질의 '블래스트'에 실린 루이스의 회화와 데생의 복제 도판을 뒤적거리면서 보다 보면 갑자기 공간의 심연 속으로 빨려 드는 듯한 현기증을 느낄 때가 있다. 파운드는 소용돌이파라는 신조어를 만들어서 루이스 작품에서 이러한 느낌을 정확하게 포착했다. 바로 이런 의미로만 생각한다면, 루이스가 한참 세월이 지난 뒤 자기 자신만이 유일한 소용돌이파 화가라고 주장한 말이 정당한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 



프레데릭 에첼스의 데생과 회화 작품 가운데 일부는 바로 이와 비슷한 시기에 찰스 레니 매킨토시가 노샘프턴에 있는 바세트 로우크 저택의 실내 장치에서 보여주었던 디자인에 매우 가깝다. 에첼스 자신은 종전 후에는 건축으로 전향했다. 그는 르코르뷔지에의 '새로운 건축을 향하여'의 첫 영문판을 번역 출간했으며 런던에서 크로포즈를 위해 하이 홀보른에 최초의 사무실 번화가를 디자인한 장본인이기도 하다. 



이와 똑같이 힘찬 장식적 틀에 박힌 수법은 로버츠의 몇몇 작품에서 발견되나. 그것들 가운데 하나로 '용을 격퇴하는 성 조지'라는 연필 데생이 1915년 4월 '이브닝 뉴스 복사판으로 실려 대중의 흥분을 불러일으켰다. 당시 로버츠는 불과 열아홉 살이었다.



데이비드 봄 버그는 이 무렵 20대 초반이었다. 그는 소용돌이파와 관계가 있었지만 공식적으로 소용돌이파 작가였던 적은 없다. 그의 초기작인 '진흙 목욕'과 '위력에 말려서' 같은 작품, 그리고 러시아 발레단을 위한 연작 석판화들은 이 무렵에 영국에서 제작된 추상이나 반추상 계열 작품 가운데 가장 완벽한 것들에 속한다. 그의 대표적인 걸작들은 다른 작가들의 작품보다 오늘날까지 더 많이 남아 있다. 그는 단지 소용돌이파의 주변에 있었을 뿐이며, 그의 작품은 색채가 더욱 자유롭고 서정적이다. 봄 버그의 초기작에서 소용돌이파의 특징인 강렬한 대각선적 요소가 보이기는 하지만 그는 이보다도 화면의 평면성을 유지하는 데 더욱 신경을 쓴 것 같다. 그의 작품에는 루이스의 작품이나 이보다 좀 덜하기는 하지만 웨즈워스, 로버츠, 에첼스의 작품에서와 같은 현기증 나는 공간 속으로 달려 들어가는 듯한 형태는 없다.



기계 비슷한 모양으로 조각한 형상을 실제 착암기에 올려놓은 엡스타인의 조각 작품 '착암기'와 런던에 와서 작품 생활을 하다가 1915년 전사한 젊은 프랑스 조각가 앙리 고디에 브르제스카의 마지막 작품은 소용돌이파의 영향을 강하게 받아 거칠고 역동적인 에너지를 표현한다. 거칢이란 실제 인생에서도 그렇지만 예술에서는 더욱이 사람들이 별로 좋아하지 않는 요소인데, 이러한 요소가 작품에 등장할 때는 대개 그에 상응하는 특별한 감수성을 동반하기 마련이다. 이 점은 루이스의 작품에는 해당하지 않겠지만 고디에와 엡스타인 작품에서는 모두 진실이다.



이와 같은 거친 에너지는 소용돌이파의 특징이었다. 소용돌이파가 이루어놓은 최상의 것은 서구 유럽의 기계적 야만성에 대한 고발이다. 즉 자기 환경의 무책임한 조절에 의한 인간의 난폭함에 대한 각성을 강력하게 시각화했다는 것이고, 바로 이 점이 입체파의 이상화된 미술이나 미래파의 낭만화된 미술에서는 소용돌이파의 독자적 가치다. 바로 이러한 점, 그리고 형태를 공간의 깊이 속으로 가속했다는 점에서 소용돌이파가 20세기 미술에 공헌한 바가 크다. 





폴 오버리

Paul Overy





다다이즘과 초현실주의 1



다다이즘

1916년 2월 초에 독일인의 시인이며 철학자인 후고 발은 전쟁을 피하여 스위스로 피난 와서 "대단히 명성이 높은 도시 취리히의 약간 소문 나쁜 구역에" 있는 마이어라이라 불리는 바에서 '카바레 볼테르'를 개업했다. 카바레 볼테르는 나이트클럽과 미술가 사교 클럽의 역할을 겸해서 젊은 미술가와 시인들이 그들의 사상과 원고를 가지고 와서 시를 큰 소리로 낭독하거나 그림을 게시하거나 노래와 춤, 곡을 연주하기도 하는 '예술적 오락 센터'로 만들 계획이었다. 2월에 발은 일기에 이렇게 썼다.



그곳은 초만원이었다. 많은 사람이 발을 들여놓을 수조차 없었다. 저녁 6시경 아직 망치질, 미래파 예술가의 포스터를 게시하는 일 따위로 바쁠 때 동양적으로 보이는 대표 4명이 손가방과 그림을 옆에 끼고 나타나서 여러 번 공손히 허리 굽혀 인사했다.

그들은 자신을 소개했다. 화가 마르셀 얀코, 트리스탄 차라, 조르주 얀코 그리고 네 번째 사람의 이름은 알아듣지 못했다. 아르프도 거기에 있었다. 우리는 여러 말 하지 않고도 곧 친해졌다.



2월 말에는 카바레가 떠들썩할 정도였고, 새 움직임에 적합한 이름을 정할 필요가 생겼다. 그 이름은 발과 휠젠베크가 우연히 독불 사전을 뒤적이다가 발견했음이 분명하다. "'다다'라고 하자!" 내가 말했다. "이건 우리 목적에 꼭 맞는 말이야. 이건 아이가 내는 최초의 소리인데, 거기에는 원시성, 최초의 출발, 우리 예술의 새로움이 있거든." 카바레는 그 후 6개월 동안 계속되었다. '취리히 연보' 서두에는 이렇게 기록되었다.



2월 26일, 휠젠베크 도착하다.



다음 해에는 다다 화랑의 개관, 차라가 편집하고 배본하는 계간지 '다다'의 창간으로 다다의 움직임은 더욱 활기를 띠었다. 전쟁 중에도 '다다'는 여러 독자, 그중에서도 파리에 있는 아폴리네르에게 전달되었다. 전쟁이 끝났을 때, 취리히의 다다이스트들은 다른 지방으로 뿔뿔이 흩어져서 활동을 계속했다. 그중 쾰른과 파리에서 가장 활발히 활동했다.

 

 

던 에이드스

Dawn Ade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