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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

현대미술의 개념 : 야수파 1

by 지유 2025. 11. 20.

1904 ~ 1907년에 앙리 마티스 Henri Matisse, 앙드레 드랭 André Derain, 모리스 드 블라맹크 Maurice de Blaminck 등은 동료 학생끼리 작은 모임을 결성하여, 야수파라는 명칭을 얻게 된 화풍을 일으켰다. 원색의 사용과 소묘 및 원근의 과장을 통한 야수파의 대담한 표현의 자유는 이들 작품을 처음 대하는 사람들을 당혹하게 했다. 그들은 단기간이나마 당시 파리에서 활동한 화가들 가운데 가장 실험적인 그룹이었지만, 20세기의 여러 예술운동 가운데서 지금까지도 가장 잠정적이고 정의하기 어려운 운동으로 평가된다. 어정쩡하게 정의된 그룹의 일원인 키스 반 동겐 Kees Van Dongen은 '어떤 종류의 원칙'의 성립도 부정했다. 그는 "사람들은 인상파 화가들이 어떤 원칙이 있기 때문에 그들에 대해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그러한 것이 성립되지 않는다. 그저 인상파 화가들의 색채가 약간 둔감하지 않은가 하고 생각했을 뿐이다"라고 말했다. 그들에게는 공통된 교조가 없었지만, 당시 그들의 편지나 노트, 작품을 통해서, 마티스나 드랭이나 블라맹크 등은 당시 회화에 대한 확고한 신념과 이념을 가졌으나 그들은 각기 아주 개성적이어서 잠시 이념을 같이 했을 뿐이었다. 마티스 등 몇몇과 함께 전시회를 열어 야수파의 일원으로 간주했던 동료들이 방향감의 결여를 경험한 것은 분명하다. 또한 그들을 들뜨게 했던, 최대한 자유를 허용했던 일시적인 흥분은 그들의 작품이 발전하고 성숙함에 따라 대부분 사라졌다. 잇따른 부작용은 야수파가 머뭇거리며 새로운 표현 수단을 모색하는 기로 빠져들면서 만족스럽지 못한 결론을 드러냈다. 

 

마티스가 그들의 지도자는 아니었지만, 적어도 주도적인 화가였음은 확실하다. 마티스는 미술 운동을 창안하려는 어떤 시도도 하지 않았지만, 작품이 뛰어나고 연장자이므로 그러한 위치에 서게 되었다. 특별한 의식하에서 한 것은 아니지만, 그는 신진 화가들에게 새로운 시각적 가능성을 열어주었으며 그 젊은이들을 이끌려고 시도하는 가운데 그들은 엉성하게 결속된 그룹을 결성했다. 그들은 1905년부터 매년 파리에서, 현대미술에서 중요시하는 두 전시회, 즉 '앙데팡당전 Salon des Indépendents'와 '가을전 Salon d'Automne'을 열었다. 이로써 그들의 회화는 당대 사람들에게 하나의 운동으로 평가받았다. 예를 들어 시인 아폴리네르는 야수파를 '일종의 입체파로의 안내'라 지칭했다.

아무튼 마티스, 드랭, 블라맹크, 그리고 짧은 기간이었지만 브라크 Braque를 포함한 이들은 야수파의 주요 작품을 내놓았다. 그러나 매우 개성적이며 독자적인 화가 4명이 한 방향으로 나아가는 데는 여러 가지 난관이 있었다. 특히 야수파로 인식하는 양식에 대해 그들은 각기 다른 방식으로 공헌했다. 그들은 때때로 서로 가깝게 접근하기도 했다. 드랭은 샤투에서는 블라맹크와, 콜리우르에서는 마티스와 함께 작업했다. 이미 1901년에 마티스는 드랭과 블라맹크의 작품 방향이 자신과 유사함은 감지했다. 그러나 이 기간에 그들의 차이는 선명하게 드러났으며, 1907년부터는 그들의 독자적 성격이 한층 확연해졌다. 

 

마티스는 1895년에 귀스타브 모로 Gustav Moreau의 화실에 들어갔다. 그곳에는 이미 조르주 루오 Georges Rouault, 알베르 마르케 Albert Marquet, 앙리 망갱 Henri Manguin, 샤를 카무앙 Charles Camoin, 장 퓌이 Jean Puy 등 학생 5명이 등록했는데, 이들은 나중에 야수파로서 작품전을 열었다. 이 화실은 화가들이 경력을 쌓는 데 크게 뒷받침이 되었는데, 국립고등미술학교에 부속된 다른 화실과는 달리 학문적인 원칙을 엄격하게 고수하지는 않았다. 모로는 자기 작품에 학생들이 질문하게끔 학생들을 적극 고무했다. 설사 반대 의견이 있을지라도 그 의견을 피력하게 했고, 무엇보다도 학생들의 독립심을 앙양하려고 했다. 마티스는 훗날 모로의 영향에 대해 다음과 같이 술회했다. "그는 우리를 대로에 올려놓는 게 아니라 길 밖으로 내쫓았다. 그는 우리가 느긋한 안일에 빠지지 못하게 했다. 그와 함께 있으면 각자 자기 나름의 기질에 맞는 표현 기법을 얻을 수 있었다." 모로는 루브르박물관의 미술품을 보도록 학생들 눈과 마음을 열어주었다. 또 학생들이 자신의 견해를 형성할 수 있게 되도록이면 이런 작품을 많이 보도록 격려했다.

 

모로의 정교하고 장식적인 비전에서 1880년대와 1890년대의 상징주의 작가들을 사로잡았던, 신비하고 낭만적인 이미지의 혼합을 찾아볼 수 있는 사람은 그의 자유스러운 태도에 그리 놀라지 않는다. 모로 역시 살롱에서 작품전을 가졌다. 그러나 당시 화가들 대부분에게서 멀리 떨어져 맴돌았으며, 고독한 과정을 수행하는 일이 어떤 것인가도 알고 있었다. 그의 주제는 자주 현실에서 유리되었다. 그것은 위스망스의 소설 <거꾸로>에서, 저자가 모로에 대한 자신의 해석을 번안해 넣은 이 소설의 '퇴폐적'인 주인공 데 제셍트의 인생만큼이나 현실에서 벗어난 것이다. 

 

모로는 제자들에게 상반성을 특별히 강조했지만 그의 특이한 작품은 제자들에게 적지 않은 영향을 끼쳤다. 즉 루오의 깊은 신앙심은 모로의 신념과 조화를 이루었으며, 루오는 스승의 작품에 매우 애착이 강했다. 그의 제자들이야말로 그의 작품이 끼치는 영향에 대해 어떤 대중이나 당대 어느 화가들보다도 더 많이 깨닫고 있었다. 제자들은, 완성 작품보다도 더 자유롭고 열정적이며 또 각기 다른 특징을 지는 그의 유화 스케치에서 그가 어떻게 실험하는가를 볼 수 있었다. 색채는 더욱 순수해지고 자유분방해져서 표현하려는 주제가 가려지고 덜 중요해졌다. 모로의 표현 방법은 때로 매우 비정통적이었다. 예를 들면 튜브에서 직접 물감을 짜내서 그리고, 또 수채화에서는 물감이 흐르고 번지게 했다. 루오가 회화의 장식적인 역할에 매달리던 마티스 작품의 특징을 포착하고, 이 특징을 마티스가 호화로운 질감을 구사한 모로에게서 계승한 것이라고 말한 것은 이러한 기법상의 독창적인 섬광 덕분인지도 모른다. 루오의 후기 회화에서도 이와 유사한 관찰이 이루어진다. 그런데 1898년에 모로가 죽음으로써 그의 제자들은 험한 세상을 맛보게 된다. 

 

사라 위트필드

Sarah Whitfiel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