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사에서 정확하게 시대 구분을 하기란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입체파 운동은 <아비뇽 거리의 아가씨들>에서부터 격동적으로 시작되었다. 은 피카소가 1906년 말경에 제작하여 이후로 현 상태로 방치되었다. 이 작품은 오늘날에 보아도 어리둥절하고 대담하다. 1960년 이전에는 아마도 어처구니없는 작품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피카소의 가장 애틋한 지지자까지도 낙담하고 당혹하게 했을 것이다. 지성적이고 개방적인 젊은 미술가였던 브라크도 처음에 이 그림을 보았을 때 아연실색했다. 그러나 그가 몇 달 뒤에 그린 여인상은 처음에 <아비뇽 거리의 아기씨들>에서 혐오감을 느꼈음에도 이 그림이 그의 예술적 진화 과정을 뒤바꾸어놓았음을 충격적으로 나타낸다.
피카소는 시작하기도 전에 <아비뇽 거리의 아가씨들>이 범속한 작품이 되지 않으리라는 것을 알았다. 그것은 지금까지 시도해 온 것 가운데 가장 큰 화폭이었고, 전례 없이 그림을 시작하기도 전에 미리 화폭에 안감을 대었다. 일반적으로 과거의 위대한 작품을 보존하거나 복원할 때 쓰이던 절차였다. 당시 피카소와 가까운 친구였던 시인 앙드레 살몽은 피카소의 마음 상태를 다음과 같이 피력했다.
피카소는 안정을 취하지 못했다. 그는 자기 캔버스를 벽으로 돌려놓고 붓을 팽개쳤다. 그는 몇 날 며칠 동안 소묘를 했다. 자기 머리에서 떠나지 않는 이미지들을 구체적으로 표현하면서, 그 이미지들을 정수만 남기고 다듬어갔다. 이것보다 더 어려웠던 작업은 거의 없었다. 그리고 피카소는 이전에 가지고 있던 젊은 시절의 풍요감을 배제하고, 대형 화폭에 손을 대 그가 이제껏 추구해 왔던 첫 결실을 거두었다.
동시대의 다른 언급들은 피카소가 그 그림을 불만스러워했으며 미완성인 것으로 생각한 듯하다고 제시한다. 일관성 없는 양식과 분명한 변화를 고려하더라도 <아비뇽 거리의 아가씨들>은 다른 모든 위대한 작품과 마찬가지로 대단히 필연적인 것으로 보이게 되었다. 이제 우리가 어느 모로 보나 원래 그림과 다른 것을 상상할 수 없다는 사실은, 그 그림이 자체의 법을 강요하면서 미학적 아름다움에 대한 새 기준을 창시했음을 강조한다. 다시 말하면, 그것은 아름다움과 추함에 대한 전통적 구별법을 파기했다. 야수파가 20세기 못지않게 19세기에 속하는 것이라면, 이 그림은 미술에서 새로운 시대가 열렸음을 알렸다. 그것은 피카소의 경력에서 중요한 방향 전환점이며, 20세기가 산출한 가장 중요한 회화사에 기록으로 남았다.
그런데 <아비뇽 거리의 아가씨들>은 입체파 그림이 아니다. 교란하는 효과를 가지는 주제와 가끔 야만적이고 표현적인 칠을 구사하는 기법은 두 가지 모두가 입체파 미학에는 생소한 것이 되었다. 만약 그것이 유별나게 미래지향적인가 하면, 그것은 또한 필연적으로 피카소의 과거 업적을 집약적으로 보여준다. 이전 몇 년간 그의 작품은 정서적으로 강렬했다. 그것은 사회적 문제점들, 문학, 그리고 놀라울 정도로 방대한 시각 자료에서 영향받았다. 다른 한편으로 입체주의는 무엇보다도 형식주의 미술로서, 회화 절차와 가치 재평가와 재발명에 중점을 두었다. 전개 방식은 외적인 영향에서 현저하게 벗어나 있었고 그 후에도 마찬가지다. 당시의 현대문학과 유대는 있었으나 모든 문학적 비유를 피해버렸다. 이 운동을 창시한 피카소와 브라크는 접근 방법이 직관적이어서 때로 그들의 작품에서 우리는 어딘가 모르게 흥분을 느낀다. 그러나 내용 면에서는 대단히 사려가 깊고 매우 지성적이었다. 그리고 일반적으로 입체파는 조용하고 반향적인 예술이었다. 입체파 화가들은 <아비뇽 거리의 아가씨들>이 대변하는 많은 것을 거부함으로써, 혁신적인 회화 기법상 개혁이 있었는데도, 작품이 제기했던 회화적 문제점들을 입체파가 풀 수 있게 되었다.
사람들은 피카소가 이 걸출한 작품을 창작하기 위해서 기반을 두었던 원천에 대해 자주 토론하고 분석했다. 예를 들면 고갱의 업적이 없었다면 그러한 그림은 실존할 수 없을 것이다. 또 날카롭고 갈게 늘어난 형태와 거칠고 흰 고명도에는 엘 그레코에 대한 피카소의 관심이 반영되어 있었다. 거기에는 그리스 도기화에서 따다 그린 요소가 있고, 고대 조각에서 따온 것, 이집트 예술에서 따온 요소가 있다. 그리고 중앙에 있는 두 인물의 두상에는 이베리아 조각의 관례적인 얼굴 표현 양식을 직접 참고한 요소가 있다. 그러나 이 그림이 입체파의 서곡으로 보일 때, <아비뇽 거리의 아가씨들>의 창작에 주어진 두 가지 주된 영향에 주목하게 된다. 왜냐하면 이것들은 입체파 초기의 발전을 조건 짓는 동일한 두 가지 예술 형태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예술가로서 피카소의 그 후에 수반되는 발전의 견지에서 볼 때 더 중요한 것은 피카소가 <아비뇽 거리의 아가씨들>을 창작하는 동안에 아프리카 조각과 접했다는 사실이다. 왼쪽 끝 '처녀'의 가면 같은 얼굴, 그리고 무엇보다 오른쪽 두 인물의 얼굴이 야만스럽게 왜곡되고 길게 갈라진 모습은 아프리카 조각이 그에게 준 충격을 입증한다. 그에게 영향을 주었을 흑인 미술의 특정한 예를 꼬집어 말하기는 어렵다. 왜냐하면 그는 단기간에 많은 가면을 모았고, 다음 해에 인물상에서는 아프리카 조각의 '모든' 특징이 나타나기 때문이다. 그리고 <아비뇽 거리의 아가씨들>에서 아프리카 미술의 영향이 일차적으로 시각적이고 정서적인 것이었다면, 피카소 자신은 직감적으로 그것에 더 깊고 더 지적인 수준으로 끌렸다. 입체파 그림이 때때로 어떤 양식적인 아프리카 전통의 영향을 반영했다고 해도 모든 시대의 양식들 가운데 가장 세련되고 지성적으로 수렴된 양식의 미학을 조건 지은 것은 '원시 내재하는 원리들이었다. 우선 한 가지만 보더라도 흑인 조각가는 서구 미술가와는 달리 작품을 시작할 때 작품 주제에 훨씬 더 개념적인 방식으로 접근한다. 그에게 작품 주제에 대한 '아이디어'는 자연주의적인 묘사보다도 더 중요하다. 그 결과는 곧 더 추상적이고 양식화된 형태에 다다르게 되고, 어떤 의미로는 더 상징적인 것이 된다. 확실히 피카소는 시각적인 외형에서 자신을 해방하려는 20세기 젊은 미술가들의 욕구를 풀어주는 열쇠가 흑인 미술에 있다는 것, 즉 재현적이고 동시에 반자연주의적인 예술이 바로 아프리카 미술에 있다는 것을 거의 즉각적으로 깨달았던 것 같다. 이러한 각성을 바탕으로 이후 몇 년간 입체파는 이전의 어떤 것보다 순수하게 추상적인 예술을 부흥시켰는데, 그것은 동시에 주변에 있는 물질계를 재현시키는 사실주의적 예술이기도 했다.
존 골딩
John Gold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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