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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

현대미술의 개념 : 표현주의 2

by 지유 2025. 11. 21.

19세기 말엽에 부활한 낭만주의는 현대 표현주의의 직접적인 기초가 되었다. 즉 유럽 문명에 거부감을 느끼고 감정적인 형태와 색채 속에 이루어진, 2차로 선택한 원시적 삶을 찬양한 고갱, 섬세한 회화를 거부하고 의도적으로 충격적인 기술을 옹호하고 충격적인 주제를 표현한 앙소르, 개인적인 불행에 대중적인 형태를 부여하기 위해 환각의 이미지를 사용한 뭉크, 예술을 통해 효율적으로 의사소통하기 위해 강렬한 자연색을 사용하여 정열적이고도 절제하면서 자연을 표현한 반 고흐 등은 모두 표현 수단을 모색하는 20세기 화가들에게 직접적인 모델이 되어주었다. 예를 들어 외관과 긴장된 형태의 자세를 통해서 효과적으로 감정을 전달할 줄 알았던 로댕은 현대 조각에 그와 유사한 기초를 제공했다. 한편 카메라는 자연주의를 일상적인 것으로 만들었다. 20세기로 전환되는 시기에 아르누보는 장식적인 면은 물론이고 형태, 색채, 선의 표현적인 능력을 개척하기 위해 통상적인 겉모습은 놀랄 만큼 자유로워졌다. 한편으로 심리학자들은 이러한 요인에 대해 우리 감정이 어떻게 반응하는가를 해명하려고 노력했다. 도스토옙스키 작품에서 파악되는 고통과 비정상적인 감각의 세계에서, 입센과 스트린드베리의 공격적 방식과 내용의 희곡에서, 니체의 신이 없는 밝고도 견고한 세계관과 그가 제안한 말들 속의 도전적 논리에서, 최근 100년간의 신비적인 운동들 및 특별히 신지학과 루돌프 슈타이너 등에 이르기까지 여러 방면에서 지지와 자극이 쏟아졌다.



표현주의는 독일에서 가장 왕성하게 번성했다. 18세기 말엽의 질풍노도 운동은 북유럽 국가에서 지중해 문화를 붕괴시킨 선구자적 시도였다. 또한 20세기 초엽의 독일 표현주의자들은 그 운동의 이념과 문학에 흠씬 젖어 있었다. 당시 독일은 유럽에서 정치적으로나 사회적으로 가장 혼란스러웠다. 이는 다름 아닌 우익과 좌익으로 나뉜 시민들이 산업화와 도시화가 급속히 진행되면서 야기된 고통을 증가시킨 그들의 패권 다툼과 전쟁에서 극단적인 방법을 썼기 때문이다.



독일의 예술 세계는 독일 연방주의에 따라 과거에도 그랬고, 현재에도 분할되어 있다. 각각의 주요 도시의 문화생활은 다른 도시와 어느 정도 격리되고 경쟁 상태에 처한 듯했다. 1900년 이후 베를린은 모든 예술의 중심지이며 뮌헨 역시 국제적으로 중요한 도시였다. 바로 다음으로는 쾰른, 드레스덴, 하노버 같은 도시들이 손꼽을 만했다. 이 도시들은 각각의 학문적인 기구를 소유했으며, 전위적인 인물에게 기회를 제공하는 데서도 균형을 유지했다. 그리하여 베를린은 모든 새로운 운동이 일어나면 얼마 안 되어 그 운동을 교류하고 전시하는 지점으로 두드러졌으며, 예술적인 영향의 성채로서 독일 황제가 친히 이 지위를 고수했다. 1918년 빌헬름 2세가 퇴위한 후, 독일 정보가 전면적으로 붕괴하면서 관료적 예술의 위치가 약화하고 예술 단체와 여러 운동이 자유롭게 번성했다. 한편 언론계는 문화적인 모험과 작은 논쟁에 관심을 보이며 이득을 얻었고, 항시 후원자들이 있어서 새로운 예술가들을 지원해 주었다. 독일의 관계는 이들을 위험한 존재로 비난하는 데 지나칠 정도로 열을 올렸다. 이리하여 예술가들은 스스로 정치에 대한 관심과 참여 의식에서 발로된 것이 아닌 충성심을 강요받았다. 사실상 일반적으로 표현주의라고 간주하는 작품 가운데 정치적 색채를 띠는 것은 거의 없는데도 표현주의에 정치적 항의 운동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그래서 좌익계 사람들 가운데 표현주의에 관심을 둔 관중이 자연히 생겨났다. 진보적인 지방자치가 실시된 곳에는, 타지방에서는 공공 회화 컬렉션 대열에 참가하려면 몇십 년을 기다려야 했던 전위 예술가들의 작품이 들어갔다. 정치적 균형의 변화는 문화 정책에서도 급격한 변화를 가져왔다. 화랑과 정기 간행물들이 예술가와 예술 단체에서 그들을 후원해 줄 지지자를 알선했지만, 독일 전역에 걸쳐서 예술가들은 자신이 직접 주최 역할을 하여 협조적인 기구와 출판을 통해 대중 앞에 자신의 예술을 내보였다.



표현주의는 주로 비공식인 두 그룹에 속한 예술가들로 결성되었는데, 하나는 다리파를 자처하고 1905년 발족하여 1913년에 해체된 드레스덴 일파였고, 다른 하나는 청기사라고 명명된, 1912년에 한 번밖에 나오지 않았던 연감의 후원으로 전시회를 연 뮌헨의 화가들이었다. 그 외의 미술가들도 후자의 그룹에 참가했는데, 빈 출신의 코코슈카와 독일계 미국인 파이닝어 등이 있다. 특히 20세기 초에 브레멘 근처에 있는 볼프스 비데에서 작업했던 화가 가운데 파울라 모데르존 베커는 종종 표현주의 물결의 선봉자로 간주한다. 마티스, 드랭, 블라맹크 등이 파리에 모여 펼친 야수파 운동은 여러 방면에 걸쳐 이것과 관련된 움직임이었고, 독일인들이 허용하려고 한 것 이상으로 독일 미술에 영향을 끼쳤다. 1차 세계대전은 일부 주도급 표현주의자들의 명성을 종식했고, 이후 독일은 대단히 변모했다. 1918년 이후 예술사적으로 볼 때 특히 전쟁 직후 몇 년간 베를린에서 효과적이었던 다다 운동과 바우하우스의 예술과 산업에 대한 논문 및 신즉물주의라고 불린 운동이 주도적이었다. 이 운동은 주관을 표출하는 데 몰두하는 표현주의에 반발하면서 나타난 사조다. 전후에도 문학과 건축 분야에서 주요한 표현주의적 활동이 나타났으나 표현주의자들이 주도한 회화가 절정이었던 때는 전쟁 전이었다. 



물론 이에 대한 내력은 간단하게 줄일 만큼 단순하지 않다. 무엇보다도 자신을 표현주의자라고 선언하고 목표를 정의한 그룹이나 운동은 절대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한 명칭은 1911년에 열린 베를린 분리파 전시회에서 연유한다. 이 전시회에 마티스와 야수파와 전 입체주의 경향의 피카소 등 파리에서 온 표현주의파에 의해서라고 명명된 작품이 포함된 것으로 표현주의라는 말이 시작되었다. 

 

노버트 린턴 

Nobert Lynt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