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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

현대미술의 개념 : 야수파 2

by 지유 2025. 11. 20.

마티스는 이론적인 화가 코르몽의 화실에 들어가 원칙을 엄격히 고수할 것을 강요받았다. 그때 마티스의 회화는 이미 시대를 앞서가고 있었고 인물 습작들은 힘찬 삼차원적 특징을 보이면서 강렬한 색채로 표현되었다. 그도 역시 원색만으로 재빨리 스케치하는 법을 실험했다. 그러나 그의 독자적인 소신은 코르몽의 마음에 들지 않았고 드디어 코르몽은 마티스에게 자신의 화실을 떠나라고 하기에 이른다.

그런데 이 시기의 루오 작품과 마티스 작품은 그다지 다르지 않았다. 즉 두 사람의 색채는 다 같이 강하고 탄력이 있었으며, 좀 더 명백한 견고함을 창조하기 위해 형체의 윤곽선을 더 진하게 했다. 그렇지만 그들은 기질상 상당한 차이가 있었다. 루오는 가톨릭 선교사였던 레옹 블루아와의 교우 관계에서 자신이 취해야 할 작품의 방향을 찾았다. 아마도 루오는 자신이, 격렬한 글을 통해 당시 혹독한 가난과 착취에 대항하기 위해 대중의 의식을 채찍질해야 한다고 믿었던 십자군적인 광신자 블루아의 시각적 통역사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 것 같다. 그러나 루오가 블루아의 작품에 들어갈 삽화로 <풀레 부부>를 그렸을 때 블루아는 맹렬히 반대했다. 블루아는 루오가 삽화를 그릴 때 전달 효과를 높이려고 의도적으로 왜곡한 요소를 오해했거나, 아니면 단순히 조잡하고 추한 그림이라고 판단하고 기분이 상했는지도 모른다.

모로는 루오의 작가 생활이 고독하게 펼쳐질 것을 예견했다. 루오가 살롱 전시나 하는 작가들과는 완전히 동떨어져 있을 뿐만 아니라 표현 방법 때문에 색채를 쓰고 왜곡된 선을 구사하는 것을 제외하고는 자기 동료들과는 어떠한 공통점도 없었음을 알았기 때문이다. 루오의 깊은 신앙심과 사회에 대한 관심은 동료들의 작품에 아무런 영향도 주지 못했다. 이런 면에서 볼 때 그의 회화를 1900년대 초기의 피카소 작품과 비교하는 것이 좋다. 하지만 일찍부터 대중은 그가 동료 화가들과 전시회를 가졌다는 사실 대문에 그를 야수파 화가로 생각했다.

그런가 하면 마티스는 친구인 마르케와 함께 거리고 나가 재빠르게 풍경 스케치를 했는데, 자기 주변 생활에서 사실적인 인상들을 포착하는 데 흥미를 느꼈다. 확실히 마르케가 지닌 소묘 능력은 마티스가 대단한 찬사를 보낼 정도로 이 방면에서 유별나게 완벽했다. 두 사람은 1860년대와 1870년대 인상주의 화가들이 선택했던 파리의 거리와 다리, 강 등을 소재로 선택했으나 그것들을 완전히 새로운 화법으로 다루었다. 마티스가 그린 노트르담 사원 그림은 피사로와 모네가 추구한 분위기인 효과와는 완전히 달랐다. 넓은 면적을 차지한 색채와 재구성한 공간은 장차 야수파가 개척할 현실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시사했다. 

파리 근교에 있는 샤투에서도 젊은 화가 2명이 같은 방법으로 실험적인 풍경화를 그렸는데, 그중 한 사람이 앙드레 드랭이다. 그는 화가 외젠 카리에르가 지도하는 파리의 작은 화실에 다녔는데, 그곳은 마티스가 코르몽과 짧은 만남 후에 다닌 곳이다. 마티스가 드랭보다 11살이나 많았고 훨씬 노련했으므로, 드랭은 자연히 마티스의 작품을 칭송했고 작품 실험에 대한 그의 지적인 접근 방식에서 여러 가지를 배웠다. 그러나 마티스 자신은 자기들의 의도가 서로 흡사하며, 또한 드랭과 샤투에서 온 그의 동료 블라맹크가 원색의 효과에 몰두하는 것을 보고 놀랐다. 성격상 블라맹크와 드랭은 정반대였다. 블라맹크는 가난한 가정에서 자랐다. 16살에 집을 떠난 그는 불안정한 생계 때문에 자전거 경주 선수로 일했다. 그는 그림에 대한 접근 방식이 체계적이지 않았다. 또한 미술 학교에 다니지도 않았고, 정규 훈련 과정을 거치지도 않았다. 그러나 현대 회화와 현대문학에 대한 지식은 상당했다. 반면에 드랭은 중산계급 출신이었다. 그의 가족은 대중적인 예술가의 이미지를 용납하지 않고 그가 택한 예술가의 길을 반대했다. 대가로서 명망 따위에 절대 얽매이지 않는 마티스가 직접 그의 가족을 찾아가 드랭의 재능을 이해시켰다. 드랭은 1901년 구필 화랑에서 열린 빈센트 반 고흐 회고전에서 처음으로 마티스에게 블라맹크를 소개했다. 훗날 이 두 젊은 화가들은 이 작품전이 그들에게 끼친 커다란 영향에 대해 회상하고 했지만, 실제로 당시 그들의 그림에는 고희에 대한 열정은 반영되지 않았다. 그러나 몇 년 뒤에, 특히 블라맹크는 작품이 발전함에 따라 거칠고 불타는 듯한 작품에 경도되었다. 훗날 블라맹크와 마티스를 완연히 갈라놓은 원인은 블라맹크가 고흐를 주관적이고 열정적으로 찬미한 데 비해, 마티스는 고갱의 냉정한 그림에 초연한 호감을 보였다는 점에서 찾을 수 있다. 블라맹크는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고갱의 그림은 내게는 항상 잔인하고, 물질적이고 일반적으로 정서가 모자란 듯 보였다. 그는 언제나 자기 작품에서 유리되었다. 화가 자신을 제외하고는 모든 게 작품에 나타나 있다." 이렇듯 선명하게 묘사하는 비평은 블라맹크가 회화에서 찾고자 했다. 드랭이 군에 복무한 1901 ~ 1904년 블라맹크와 드랭이 주고받은 편지가 없었다면, 혹자는 그들이 몇 년 뒤까지도 반 고흐의 회화를 본 적이 없을 것이라고 단정 지었을지 모른다. 이것은 두 사람이 그때까지 화가로서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하지 않았음을 말한다. 

이 시기에 주고받은 편지에는 드랭의 자신의 자질에 대한 확신 없음과 회의와 망설임이 확연히 드러난다. 아울러 소설가가 되려고 갈등하던 모습도 보여준다. 블라맹크는 자신의 지식을 경시하는 경향이 있었음에도 대단히 박식했고, 드랭이 문학적 취향을 형성하는 데도 중요한 역할을 했다. 블라맹크와 드랭은 졸라를 대단히 찬미했는데, 드랭의 편지 내용에는 감옥 생활을 묘사한 졸라의 소설에서 몇 페이지를 그대로 따온 것이 있을 정도였다. 블라맹크는 실제로 소설 몇 권을 계속 출간했는데, 그는 자기 작품을 "미르보의 작품보다 열등한 존재"라고 불렀다. 이러한 초창기에 블라맹크는 시시한 정치 단체의 행동 대원이기도 했는데, 드랭은 이런 일에 관여하지 않았다. 1890년대 후반의 대다수 사람과 마찬가지로 블라맹크도 폭탄 투척과 기타 수많은 소요로 파리를 혼란스럽게 했던 무정부주의자들이 봉기하는 주변을 맴돌았다. 그는 무정부주의 계통의 신문이나 잡지에 논문을 기고했다. 그러나 그 이상 깊이 관여하지는 않았다. 변덕스럽고 또한 쉽게 열광하는 그의 기질이 확실히 무정부주의의 가능성과 잘 어울렸음은 사실이다. 그런데 실제로 그가 초기에 예술 목표에 관해서 쓴 글을 보면 그의 언어는 확실히 정치적 색채를 띠었다. 불붙기 쉬운 이러한 열성은 장점인 동시에 단점으로 드러났다. 몇 년 동안 드랭과 블라맹크는 완전히 국지색의 한계성을 극복할 가능성에 사로잡혀 있었으며, 더욱 중요한 것은 자기 시각의 한계성을 뛰어넘으려는 데 있었다.

 

사라 위트필드

Sarah Whitfiel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