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장팡과 잔느레는 공학이나 산업 계획, 건축 그리고 회화에서 기능주의를 인문주의적인 용어로 표현한다. 그리고 그것의 기저를 이루는 것은 '기계적인 선택' 개념이다. 이러한 개념의 출발점은 르네상스 때와 마찬가지로 인체다. 사람의 몸은 그것 자체로 사람들이 추구하는 질서를 드러내는 것으로 믿긴다. 모든 기관이 기능적인 필요성에 따라 끊임없이 적응한 결과인 것이다. "계속 기능에 호응함으로써, 어떤 동일한 양상을 보이는 경향을 확인할 수 있다." 그 경향은 형식과 기능 간 조화가 완벽해짐에 따라서 노력이 점점 더 많이 절약되는 추세다. 인체에서 더 나아가 오장팡과 잔느레는 사람이 단지 그들의 기능적인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 창안한 물체로 옮겨간다. 그리고 어떤 '전형적 오브제'는 유리잔이나 병같이 지속적인 욕구를 충족시켜 주기 위해서 완성된 것이라는 사실도 발견한다. '이러한 물체는 유기체와 관련을 맺으며, 또 그것을 완성한다.' 그것들은 사람들과 조화를 이룬다. 건축이나 공학이나 산업 계획은 모두 주거 공간, 각종 기구, 통신 수단 등과 같은 인간의 지속적인 욕구와 관련이 있다. 이렇게 해서 내리게 된 논리적인 결론은, 그것들에 대한 기능적인 접근은 인본주의적이라는 것이다. 인본주의 예술의 균형은 인간의 욕구 때문에 결정된 균형이라는 뜻이다. 그러나 오장팡과 잔느레가 말한 기능이란 효용이라는 뜻 이상을 의미한다. 거기에는 미적 기능의 의미도 포함되어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왜냐하면 이제껏 살펴본 바와 마찬가지로 인간의 기본적인 욕구에 예술에 대한 욕구도 포함되어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잔느레는 다음과 같이 자신의 관점을 설명한다. 한 공학도에게 다리를 만드는 데 똑같이 편리한 안이 몇 개 있다면, 균형상 가장 조화로운 도안을 선택할 때만 예술가가 될 수 있다. 예술은 유용한 것은 아니지만 필요한 것이다. 그것이 그림이 그려지고, 빌딩이 '그 안에서 살 수 있는 기계'로서가 아니라 하나의 '건축물'로 세워지는 이유다.
기계는 순수주의자들에게 중요하다. 그러나 주도적인 역할로서 중요한 것이 아니라 보조적인 역할로서 중요하다. 기계는 인간의 지속적인 질서욕에 대하여 항상 새로운 해답을 제시해 왔다. 반면에 예술은 새롭지는 않지만, 인간의 욕구에 해답을 제공해 왔다. 새로운 기계는 구식 기계를 몰아내고, 더 새로운 기계에 의해 밀려나지만, 예술 작품은 다른 예술 작품으로 대치되는 법이 없다. 예술이 형태와 선과 색채에 반응하는 눈과 마음과 몸의, 불변의 생리학적 구조에 바탕을 둔다는 말을 종종 듣는다. 과학과 기계는 가변적인 지식 구조에 바탕을 둔다. 기계는 '에스프리 누보', 즉 낡은 질서의 주제 속에서의 정확성과 복잡성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창조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이 기술적인 차원에 한정되는 한 예술 작품이 될 수는 없다. 나날이 발전하는 기술 과학 안에서 항구적인 가치를 지닐 수 없기 때문이다.
순수주의자들은 예술의 기본으로서 감각 작용의 문법과 구문론에 대해서 자세하게 설명했다. 형태, 선, 색깔 같은 것들은 변하지 않는 시각 반응에 기초하기 때문에 문화 변천에 따라서 변하지 않는 어떤 언어의 요소와 같은 것으로 표현된다. 순수주의자들은 엄한 법률의 제정자다. 그들의 초점은 지속적인 요인에 맞추어져 있다. 그래서 표면적 요인으로 보이는 색깔은 형태에 종속되고, 색깔은 인상주의에서 보이는 바와 같이 형태의 총체성을 너무도 쉽게 파괴할 수 있다. 형태 자체는 일차적이나 이차적으로 어떤 때는 부차적인 연상과 관련 없이 지속적인 효과를 지니는 것으로 또 어떤 때는 그렇지 못한 것으로 규정된다. 하나의 입방체는 대체로 비슷한 조형 의미를 지니지만 자유로운 나선형 선은 뱀으로 보이기도 하고, 소용돌이처럼 보이기도 한다. 일차적 형태는 수직과 수평이 장악한 불변의 고정적 규율에 따라 구성의 기본으로 확립되었다. 그리고 구성은 일차적인 형태적 주제 위에 정교하게 발전되는 이차적인 것으로 규정된다.
이렇게 완벽하게 형태적 언어가 발전하는 것과 조화와 정확도의 추상적인 이상형을 강조하는 것을 보면 순수주의 그림에서 병들과 기타들과는 매우 다른, 아주 생소한 곳으로 끌려 들어가는 기분이 든다. 그 이론의 논리적인 귀결에는 정교하지만 묵묵한 데 슈틸식의 아주 엄한 건축적인 회화가 어울릴지도 모른다. 그러나 순수주의가 분석적 그리고 종합적 입체주의의 오래된 주제를 계속 주장한다고 해서, 그것이 타협은 아니다. 그것 역시 예술의 수단과 목적에 대한 엄정한 고찰의 결과이기 때문이다. 오장팡과 잔느레의 정물화의 주제는 실제로 그들의 인본주의를 하나의 총체로 결합한다. 그리고 그들의 작품을 공학과 '전형적인 오브제'의 실제적인 세계와 연결해 주며, 실제적인 차원과 미학적인 차원의 가교를 구성한다. <에스프리 누보>라는 잡지에 실린 순수주의자들의 주장에 따르면, 일차적인 형태적 주제를 상술하는 데 그치는 예술은 단지 장식적이다. 거기엔 <현대 회화>지에서 예술에서 기대되는 '하나의 지적이고, 정서적인 감정'이라고 정의했던 그 무엇이 없었다. 잔느레는 그 감정을 '열정'이라고 불렀다. 그것은 국제적인 영향력을 가졌던 그의 저서 의 바탕을 이루는 한 논문에서였다. '열정'은 무질서한 주변 환경 속에서 직관적으로 질서를 찾아내는, 다시 말해서 자연과 인위적인 물질세계에서 예술을 발견해 내는 예술가의 능력이다. 과학자가 혼돈된 자연현상 뒤에 숨어 있는 복잡하고 균형 잡힌 법체계를 재구성할 수 있다면, 예술가는 외계 물질 가운데 이러한 체계를 지각할 수 있도록 형태를 드러내는 것들을 직관적으로 발견하는 능력이 부여된 사람이다. 그러므로 순수주의자들의 그림 속에 있는 병이나 기타는 이러한 질서가 그 안에서 발견된 물건이다. 질서의 본질은 명확하다. 왜냐하면 순수주의 회화의 대상물은 '전형적 오브제'이기 때문이다. 그것들은 인본주의적 기능주의의 본질이다. 이 본질에는 절대적인 효용성에서 유래하는 정확성, 단순성, 균형의 조화 같은 것들이 있다.
순수주의자들의 견해에 따르면, '전형적 오브제'에는 그 자체를 위대한 예술품의 주제로서 인간의 모습보다 더 상위에 놓는 일종의 진부함이 있다. 인간의 모습은 너무나 쉽게 특정한 감정을 불러일으킨다. '전형적 오브제'는 너무 평범해서 남의 주의를 환기하게 시키지 않기 때문에, 그래서 모든 가능한 언어적인 연상 작용과 무관할 수 있기 때문에 감점에 영향을 끼칠 수 없다. 병을 보고 욕정을 느낄 수는 없는 것과 같다. 이렇게 '전형적 오브제'는 예술에서 형태에 대한 일반화된 강조가 필수적인 점을 물리적인 세계에 혼돈의 위험 없이 연결해 준다. 그리고 결론적으로 순수주의가 데 슈틸과 입체파에서 독립된 운동이라는 사실은 사물에 대한 순수주의적 접근 방법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오장팡과 잔느레는 '열정'이 없다는 이유로 순수 추상을 배격했다. 그것은 메소니에의 사진적 사실주의를 구성이 없다는 이유로 배격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그리고 입체파의 가변적 시점에 따른 분석 방식에 새로운 명료성을 부여했다. 글레즈와 메챙제의 1912년판 <입체파에 대해>에 적혀 있는 규범을 따르는 이상적인 입체파들과 마찬가지로, 사물의 한 '필수적인' 면에서 다른 필수적인 면으로, 말하자면 유리잔의 원형 밑받침에서 위로 갈수록 점점 얇아지는 옆모습으로, 그리고 다시 원형 테두리로 옮기면서, 그것을 단일한 형태적 주제로 변형시키기 위해서 시점을 변화시켰다. '전형적 오브제'의 출발점은 견고하게 유지되며, 이러한 방식으로 기능적 효율성의 실제적인 질서가 미적인 질서에 연결된다. 입체파 방식 가운데 애매한 것은 자취를 감추었다. 그것은 데 슈틸과 마찬가지로 광범위한 포용력을 지녔으나 그것으로부터 독립된 하나의 철학 도구가 되었다.
크리스토퍼 그림
Christoper Gre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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